4·3 발발 이전 제주는?…해방 후 '섬의 기억'
조승원 기자  |  jone1003@kctvjeju.com
|  2021.03.2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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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면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이 73주년을 맞습니다.

올해는 4.3특별법이 개정돼 그 어느 해보다 뜻깊은 4.3을 앞두게 됐는데요,

4.3 해결에 다가서는 시점에 발발 원인과 역사적 교훈을 다시 짚어봅니다.

1947년 3.1발포사건부터 4.3사건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조승원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올해로 개교 114년을 맞은 제주시 북초등학교.

74년 전인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곳입니다.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해방 이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며 모인 규모만 3만여 명.

<양유길 / 3·1절 기념대회 참가(86)>
"청년들이 깃대가 작은 게 아니라 하늘 높이 솟는 기들을 달고서는 부락마다 왔는가 서귀포에서도 왔고, 한림, 표선에서도 왔고…."

3.1절 기념대회에 이은 시가행렬 과정에서 어린 아이가 기마경관 말 발굽에 치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경관은 사고를 수습하지 않은 채 말을 내몰았고, 군중이 항의하자 경찰의 발포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관덕정 광장 부근에서 시민 6명이 숨진 3.1절 발포사건.

<송영호 / 3·1발포사건 희생자 유족(86)>
"저쪽에 망루대가 있었거든. 거리상으로 보면 한 50m 안팎이거든. 평지에서 사격을 했으면 다치지만, 저 위에 높은 데서 조준사격을 해버린 거지."

<박태균 /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제주도는 그 정도로 분열이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행사를 하는데 발포가 이뤄졌고, 사람이 죽었다,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라는 건 제주도민들한테는 큰 충격으로 다가갔던 것 같아요."

무고한 죽음에 분노한 도민은 조의금 모금과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발포 원인을 찾거나 민심을 수습하는 대신 경찰을 추가 파견해 대규모 검거 작전을 폈습니다.

3.1발포사건 이후 한달 동안 검거된 도민만 500여 명.

검거 선풍은 1년 넘게 지속돼 2천 500명까지 늘었고 여기에 고문치사 3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상황은 일촉즉발로 치달았습니다.

<양조훈 /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제주 사회는 어쩌면 미군정과 제주도민 간의 간격이 물과 기름처럼 깊은 상처가 생기는 거죠.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4·3 무장봉기가 일어나는 것이죠."

3.1발포사건을 평화롭게 해결했으면 발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4.3 사건은 70년 넘은 지금까지도 평화와 화해라는 가치를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KCTV뉴스 조승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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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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