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TV 4.3 기획뉴스 세 번째입니다.
4.3 광풍에 살아남은 이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 교육 재건에도 힘썼습니다.
화재로 사라질 뻔 했던 성산 온평초등학교 사례가 대표적인데요.
해녀들은
마을어장 일부를
'학교바당'으로 지정하고
미역으로 번 수익금 모두를 기부하며
다시 학교를 재건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김경임 기자의 보도입니다.
1946년 설립된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초등학교 입니다.
개교 80주년을 맞았지만
학교 역사는 한 순간에 사라질 뻔했습니다.
개교 4년 째만인 1950년 12월
목조 건물이었던 교실 4동 전부가 화재로 잿더미가 됐습니다.
구순이 넘은 어르신은 76년 전 당시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현옥우 / 온평 어촌계 해녀 (92세)>
"밤중에 사이렌 소리가 나니까, 아이고 물바가지 어디 갔냐, 물통은 어디 갔냐 해서. 물을 얼마나 해야 불을 끌 수 있겠어. 요새는 큰 차로 끄지만, 물통을 (등에) 지어서 비워봐야…. 한 며칠 동안 연기가 났어. 한 며칠 동안. 돌멩이도 치워야지, 나무도 치워야지, 불씨도 치워야지. 온평리 어르신들이 아주 고생했거든.“
4.3 때 성산면 10여 개 마을에선 470명이 희생됐고
전쟁 시국까지 겹치며
학교 신축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교육 재건에 앞장선 건 다름 아닌 어멍들, 물질 해녀였습니다.
물살이 센 온평 바다는
전국에서 으뜸가는 미역 주산지였습니다.
미역철이면
미역 방학이 있을 정도로 온 마을이 함께 했고
그 중심에는 해녀들이 있었습니다.
4.3 비극의 상처 속에서도
해녀들은
신당과 해녀 신앙에 의지하며
아픔을 보듬고 무너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마을어장 일부를
아예 학교바당이라 이름 짓고
그 곳에서 수확한 미역은
교실 4학급을 올리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장광자 / 해녀>
"불나서 (학교가) 모두 타 버리니까 축사같이 초가집을 지어서 신발 신고, 공부를 하는지 마는지 아이들은 가르쳐야 되고 학교 지을 돈은 없으니까. 양쪽 바다 구역을 나눠서 신산, 신양 경계를 만들고 양쪽 바다에서 공동 물질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하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도 했지만.”
이들의 헌신 덕분에
화재로 전소된 이듬해인 1951년 2월,
학교는 다시 지어졌고 배움은 이어졌습니다.
이후 1956년에 6학급으로 늘어났고
이는 학교바당에서 십시일반 모은 해녀 수익금 덕분이었습니다.
1961년 세워진 해녀 공로비는
쓰러진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해녀들의 기록이자 역사입니다.
<현옥우 / 온평 어촌계 해녀 (92세)>
"여기 비석들 온평리 청년들은 있는 걸 몰라. 우리 아들도 모를걸. 내가 아들보고 비석 가서 한번 봐라, 할머니들이 고생했었다, 할머니들 없었으면 이거 학교도 못 세웠을 거라고 했지."
4.3의 광풍 속 가족 상실의 아픔을
교육 기부와 재건을 통해
주체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좌혜경 / 전 국가유산청 무형유산위원>
"학교를 되살리기 위해서 즉, 자기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공간을 복원하기 위해서 늘상 경계가 돼서 해녀들의 다툼의 원천이 됐던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지정해서, 이 바다에서 나온 미역을 통해서 학교를 복원하는 정말 지혜로운 어머니들의 그런 모습이 바로 이 학교바당에 남아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학교 바당은 생업의 터전을 넘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치유와 연대의 상징이 되었고,
제주 해녀 그리고 어멍은
4.3으로 무너졌던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 주역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KCTV 뉴스 김경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