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취재수첩] "제주 위안소 연구 시급"
이정훈 기자  |  lee@kctvjeju.com
|  2019.07.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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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진 앵커>
앞서 리포트에서 보셨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연합군과의
전쟁 막바지에 최후의 보루로 삼고 요새화했다는
기록은 많았지만
제주에 위안소가 운영됐다는 증언은 처음 나온 건데요.

취재기자와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 기자, 이번에 오시종 할아버지는
어떻게 위안소 존재를 증언하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이정훈 기자>
네, 이번 증언은 제주지역 일본군 유적을 전문으로 연구한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의 도움으로 이뤄졌는데요.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와 같은과 고성만 교수가
제주에 남아 있는 일본군 유적을 연구하기 위해
마을을 조사하다
우연히 오시종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성사됐습니다.



<오유진 앵커>
하지만 아직까지 위안소 존재는
오직 오시종 할아버지의 증언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연구팀이 위안소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이정훈 기자>
네, 아쉽게도 일본군이 제주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대 연구팀은
당시 성산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에 대한 기억과
위안소 출입 군인이나
운영 형태에 대한 오시종 할아버지의 증언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유진 앵커>
오시종 할아버지가 주장하는 위안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이정훈 기자>
제주대학교 연구팀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성산리에
2군데 위안소가 운영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구요.
기존에 마을에 있던
집을 징발해 위안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위안소에는 5~6명이 여성들이 있었고
대략 20대 여성들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곳에 있던 여성들은 물을 길으러 다니는 등
바깥 출입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필요한 물품을 운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유진 앵커>
위안소는 어떻게 운영됐나요?

<이정훈 기자>
오시종 할아버지는 이들 위안소에 일반 일본군인들이 출입했던 것은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카렌이라고 있는데요.
폭탄을 실은 보트를 타고 연합군 함대를 자살공격하도록 임무를 받은
'인간병기’로 불리는 일본 해군 특공부대입니다.
이들 대원들만 다녔었다고 오 할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유진 앵커>
오 할아버지의 증언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을텐데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기록 등 검증이 부족한데
공개 기자회견을 가진 이유가 있을까요?

<이정훈 기자>
네, 제주대 연구진도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인데요.
중국 등 다른지역과 달리 국내에서의 일본군 위안소 실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지금도 국내 학계에선 일본 학자들의 연구자료를 상당히 인용하거나 참고하고 있는데요.

이번 오시종 할아버지의 증언을 계기로
정부나 학계가 국내 위안소 문제에 관심을 갖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서 리포트에서 봤듯 당시 위안소 피해자 목격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고령과 건강상태를 고려하면
관련 연구를 더이상 늦출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오유진 앵커>
과거사 반성 없이 오히려 경제 보복에 나서는 일본 정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앞으로 더 많은 목격자 진술과 연구가 뒷받침돼서
일본 주둔군의 위안소 운영 실상이 반드시 밝혀져야하겠습니다.

이정훈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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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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