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 오후 3시 10분쯤 평화로 유수암 인근에서 승합차가 가드레일을 들이 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60대 남성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고 사고 처리 과정에서 교통 혼잡이 빚어졌습니다.
경찰은 서귀포에서 제주시 방면으로 오던 승합차가 단독 사고를 낸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제주서부소방서
4.3 송년 기획 내일(13)은 다섯번째 순서로 4.3 여성들을 위한 제도권 차원의 해결 과제를 조명합니다.
수용시설에 갇혔지만 입증 증거가 없어 희생자로 불인정된 이들의 구제 방안과 각종 고문과 학대, 인권 유린을 당한 여성들의 피해 회복 대책, 4.3 마을별 재건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여성들의 생애사와 가족관계 회복 주체로서 더 많은 생존 여성들의 참여 필요성 등을 학계, 법조계, 4,3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함께 보도할 예정입니다.
KCTV 4.3 송년기획 네번째입니다.
4.3 어멍들은 서로 의지하며 초토화 작전으로 사라졌던 마을을 재건하고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4.3 여성 피해가 축소 은폐된 것처럼 4.3 이후 역사에서 제주 어멍들의 생애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용원 기자입니다.
4.3 소개령으로 초토화됐던 중산간 마을.
슬레이트 지붕의 돌담집들이 보입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지어진 4.3 이재민 복구 주택입니다.
1948년 11월 21일,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주민 150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6년이 지나, 국가 주도의 중산간 마을 원주지 정착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작성된 난민 정착 보고서.
중산간 4.3 피해 마을이 5만 분의 1 지도에 지명으로 표시됐습니다.
금악리 복구 계획에는 전체 280세대 가운데 180세대가 정착했고 100세대는 이주 예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금악리 7개 마을로 돌아간 이들은 없었고 피해주민 1천 130명 가운데 몇명이 정착했는지 이 보고서 만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유철인/제주대 명예교수]
"여성들이 마을을 재건하는 거나 농사를 다시 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국가는 그냥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해서 저는 거의 방임 상태였다고 보거든요."
아버지와 남편, 아들은 죽거나 행방불명됐고 마을로 돌아온 여성들에게 남은 건 잿더미가 된 땅 뿐이었습니다.
피해가 심했던 중산간 한 마을은 가정의 70% 이상이 남성이 없는 홀어멍 세대였습니다.
남성의 노동력이 상실된 마을에서 살아남은 어멍들은 함께 했습니다.
물을 길어다 흙을 밟고 벽과 지붕을 올리며 집을 지어갔습니다.
4.3 소개령으로 수용소에 끌려갔고 혹독한 피난 생활을 경험했던 여성과 남은 가족들에게는 더 없이 안전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김춘자 4·3 유족 (88세)]
"흙과 물을 부어서 소하고 사람들이 직접 밟고 말리면서 이 집들을 다 지었어. 그 시절에는 어느 누구 할 거 없이 사람들이 멋지게 살았어요.
하나도 싸우지 않고 한 식구같이 살았어요.
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니까."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돌집 벽담에는 당시 어멍들의 손길과 수눌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김춘자 4·3 유족 (88세)]
"끈적끈적하게 범벅처럼 만들어서 벽에 바르면서 아이고 그때 시절에 아이고 우리도 집도 있어. 집 있어도 집 자랑 말아라.
우리도 집 지어서 살고 있어. 그러면서 이렇게 흙질도 한 거야. "
[강경숙 젠더플러스연구소 대표]
"홀어멍들과 그 딸들, 어린 동생들이 힘을 합쳐서 마을을 재건하고 밭을 일구고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돈을 모아서 마을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
폐허된 마을을 재건하고 마을 살림을 책임진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국가의 지원은 전무했고, 여성들은 십시일반 돈을 보태며 마을을 일궈냈습니다.
어멍들의 이름이 적힌 기금 영수증은 마을을 재건하고 무너진 공동체 복원을 위해 연대했던 생존의 기록들입니다.
[안관홍/한림읍 금악리장]
"그때는 마을이 단합이 잘 됐죠. 서로 살자였거든요.
보릿고개도 있었고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도우면서 살자 했죠. 또 이렇게 재산이 없는 분들은 적게 내도 됩니다. 그렇게 배려도 해서 공동체가 잘 형성된 거죠."
등짐으로 무거운 돌을 날라 길을 만들고 터전을 이룬 마을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4.3으로 초토화됐던 중산간 마을 300곳 가운데 절반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1948년 아라동 학살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현경아 어르신도 구산마을 재건을 위해 집터를 만들고 손수 주춧돌을 세웠습니다.
[현경아 4·3 유족 (105세)]
"이 사람은 주춧돌을 밤에 다 세워놓으니 1등 했다고 남들이 다 칭찬하고 나도 성과를 냈고 그렇게 30 세대를 지어서 그 멀리 사는 친척이나 주민들이 모두 이곳으로 와서 집을 지었고 나도 그때 지은 집에 살아.
내가 고생해서 성공해 이룬 거니 고생한 건 생각 안 해."
4.3 홀어멍들은 서로 의지하며 모진 삶을 견뎌냈고 이는 마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허영선 전 4·3 연구소장]
"이들이 이렇게 강인하게 끈질기게 생존을 위해 이렇게 살았던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가만히 앉아있으면 온 식구가 굶어 죽는다라고 하는 사랑의 힘이라고 봅니다. 원천적인 게 그거예요."
[강경숙 젠더플러스연구소 대표]
"이 협동과 연대 문화가 없었다면 이 분들은 굉장히 많이 어렵게 살았을 것이고 지금의 제주 사회도 이루어지기 힘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성의 4.3 피해가 축소 왜곡돼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4.3 이후 재건 역사의 주체로서 제주 어멍의 희생과 노동, 돌봄의 가치는 70여년 지난 지금도 제대로 평가받거나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KCTV뉴스 김용원입니다.
KCTV 4.3 송년 기획 세번째입니다.
제주 여성들은 4.3에서 살아남았지만 불안정한 시국 탓에 법적인 가족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각종 권리 행사의 주체로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이 같은 여성 유족들의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것도 살아남은 어멍들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김용원 기자입니다.
나라를 뒤흔든 비상 계엄 선포에 4.3을 겪은 고완순 어르신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70여년 전 4.3 계엄령 비극의 두려움이 엄습했고 나라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차 올랐습니다.
[고완순/4·3 유족(85세)]
"자유민주주의가 되니까 이렇게 데모도 할 수 있잖아. 우리 땐 그냥 죽으라면 어디 가서 골방에 갇혀야 했고 어디 가려고 하면 팔에 도장 찍고 마을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4·3 때에는.
잘 살려고 하는데 또 사리사욕 채우려고 계엄령 선포가 웬 말이야."
1949년 1월 17일, 북촌리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에 죽자 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마을 주민 3백여 명을 모아놓고 한날 한시에 죽였습니다.
아비규환 속에 살아남은 어르신은 매일 아침마다 마을 위령비를 찾아 원혼을 위로합니다.
[고완순/4·3 유족(85세)]
"강영심 어른도 북에서 대한민국, 제주도 와서 이름도 없이 학살당해서 돌아가셨어요."
4.3에 아버지와 아들, 남편을 잃은 어멍들은 남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게 유일한 존재 이유였습니다.
연좌제 피해를 입을까 호적이나 족보에 자녀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고 관공서를 가는 것도 무서워 출생 신고나 실종, 사망신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 강경숙 젠더플러스연구소 대표]
"남성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자로 가고 호적에도 올라갔는데 남성 가장을 잃은 집안의 딸이나 어머니는 호적에 올리지 못한 거예요.
내 인생의 존재나 삶의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이다. 굉장히 힘들어하신 그런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주 성원권이 박탈됐다는 의미는 이후에 재산 분할이나 상속권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거기에서도 배제되는 3중 4중의 어떤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정부의 가족관계 불일치 실태조사에서도 정정 대상 유족 208명 가운데 76%는 여성이었고 혼인 여성의 약 80%는 사실혼 관계였습니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정작 법적인 가족으로 인정되거나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인터뷰: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여성들이 갖고 있는 공적인 어떤 지위는 여전히 취약한 부분들이 있었고 그런 모순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고,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문제도 사실 가장 보수적인 질서를 흔드는 작업들인데 그 보수적인 질서의 문제를 가장 정면으로 맞닥뜨린 4·3 주체가 바로 여성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가족관계 불일치 여성 유족들에게는 족보나 비석이 아닌 주변 이웃, 친척들의 증언이 유일한 입증 수단입니다.
유독 홀어멍들이 많은 북촌마을에서 고완순 유족은 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유족들이 제 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인을 자처해 진짜 가족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4.3을 목격한 1세대 여성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고완순 어르신과 함께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영자 4·3 유족 (91세)]
"호적에 올릴 여유가 없었어. 결혼해서 살았다 말았다 할 때 4·3으로 죽어서 호적에 올리지 못했지. 아버지가 희생되니까 너는 모르지.
(언니 치매 걸리지 말고 얘네 가족관계 정정 신청 올릴 때 보증 서주세요.) 보증하지. 나 치매 안 걸리면 그건 보증 앉을게. "
이름 없는 여성 희생자의 비석에 제 이름을 새기고 가족을 찾아주는게 살아남은 자의 소명이고 역사를 바로 잡는 길이라 믿고 있습니다.
[고완순/4.3 유족(85세)]
"살아있으면 살아 있는 값을 해드려야 되잖아요.
그 얼마나 조상 잃고 고생하고 그 많은 긴 세월을 살았는데.. 끝까지 할 겁니다. 저는 몰살된 가족들도 찾을 때까지 제가 머리에 치매 안 걸리고 걸을 수 있는 한, 계속 하겠습니다."
4.3 여성들의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것도 결국 제주의 어멍들이었습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국가 중심의 제도적 질서 하에서 가장 모순을 첨예하게 경험했던 여성이 또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는 그런 장면들을 더러 확인한 점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행동하는 어멍들은 해체된 가족, 공동체 회복이라는 4.3 해결의 주체로서 다시 거듭나고 있습니다.
KCTV 뉴스 김용원입니다.
KCTV 제주방송은 4.3 특별기획 네 번째로 내일(12)은 뒤틀린 가족관계 해결의 주체였던 4.3 여성들이 주도한 공동체 회복 과정을 조명합니다.
4.3 소개령이 해제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남성 가장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복구 주택 건설과 마을 재건까지 이뤄낸 4.3 어멍들의 수눌음과 생존의 연대 과정을 주요 사례를 통해 전해드립니다.
이에 더해 4.3 여성들의 마을 재건과 생애사에 대한 채록과 실태조사 연구 필요성도 제시합니다.
제주지방검찰청이 농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강병삼 전 제주시장과 동료 변호사 4명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4명 모두에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강 전 시장 등 피고인들은 지난 2019년, 아라동에 있는 농지 약 7천 제곱미터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경작 의사가 없는데도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허위 기재해 농지를 취득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강 전 시장 등 피고인들은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발급받지 않았다"며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선고 공판은 다음달 21일 열릴 예정입니다.
제주카메라기자회는 성명을 내고 국민의힘은 내란죄 혐의를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적극 나서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번 비상계엄을 막지 못했다면 제주에 계엄이 선포됐던 4.3 처럼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대통령 탄핵 만이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민들은 헌법에도 없는 국민의힘 당 대표와 국무총리의 권한 행사 발표에 분노하고 있다며 대통령 탄핵에 국민의힘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제주지방법원 4.3 재심 재판부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비판했습니다.
제주지방법원 4.3 재판부 방선옥 부장판사는 오늘(10) 열린 제5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에서 "지난 주 계엄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막아섰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4.3과 같은 일이 재발해선 안된다며 유족들은 이번 무죄 선고로 뒤늦게라도 위로가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올해 마지막으로 열린 재심 재판에서 군사재판과 일반재판 수형인 50명이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아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KCTV 제주방송은 4.3 특별기획 세 번째로 내일(11)은 4.3 과제 해결 주체로서의 여성을 조명합니다.
정부 가족관계 불일치 실태조사에서 정정이 필요한 유족의 약 80%는 여성으로 파악됐습니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입증 수단이 부족한 상황에서 보증인을 자처해 뒤틀린 여성 유족들의 가족관계 회복에 노력하는 4.3 생존 여성들을 취재했습니다.
특히 4.3 당시 남자 희생자가 많았던 북촌 마을 홀어멍들의 가족관계 회복 사례 등을 전해드립니다.
KCTV가 송년특집으로 마련한 4.3 당시 제주 여성들을 조명하는 기획뉴스 오늘은 두번째입니다.
4.3 여성들은 학살 현장에서 죽음의 목격자이자 남편과 아들을 대신해 모진 고문을 당한 피해자였습니다.
하지만 인권 유린 피해 실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고 가부장적 시대상에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김용원 기자입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제복 차림의 남성들.
도로 한 복판을 점령한 기마 경찰과 달리 사진 구석, 돌담에 바짝 붙어 물허벅을 지고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제주 여성이 있습니다.
[허영선 /전 4·3 연구소장]
"낯선 기마경관만 봐도 얼굴을 돌리고 회피해서 지나가잖아요. 왜일까요? 표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한 가정에서 딸들이 많은 가정 속에서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다 이러면은 남아나지 않았어요. 반드시 주목을 합니다."
1948년 말 계엄령 국면에서 20살 처녀는 좌익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강경진압 토벌 사령부의 중심이었던 농업학교에 갇혔습니다.
죽음의 천막으로 불리던 수용소에서 즉결 처형을 기다리던 이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영자 96세]
"내일은 벽돌집, 석방시켜 줄 거니까 좋은 집으로 갈 거라고. 한차로 실어다가 19일 날. 날도 안 잊어버려. 섣달 12월 19일 날 서문통 내창에 데려가서 팡팡 쏴 죽였어."
돌아온 고향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북에서 온 서북청년단, 그리고 군인과 경찰의 2차 가해와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양영자 96세]
"그러니까 말 안들으면 또 보내버리겠다고. 4·3 순경이 그렇게 했었지. 버젓이 부인 있는 사람도 나한테 장가들겠다고 하니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동네에 살면서 처자식도 있는데 딸을 줄 수 있느냐 그래도 억지 부렸어. 아이고 나 며칠 밥도 못 먹고 막 무서워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우리 어머니."
남은 가족의 생존, 유지를 위해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강제 결혼을 강요 받았던 여성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강춘화 4·3 유족(83세)]
"그 순경들 그렇게 하니까 안가잰 해도 우리 죽여버릴까 봐 우리 고모 시집 안 가면, 친척들을 죽여버릴까 봐 할머니가 시집 가라고 한 거야."
[강경숙/젠더플러스연구소 대표]
"남성 가족을 대신해서 폭력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이런 사례들. 그리고 강제 결혼을 당하기도 했고요. 그런 사례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성적 폭력으로 드러났고."
혼인한 제주 여성들은 군경의 또 다른 표적이 됐습니다.
양중윤 어르신은 결혼 4년차였던 1948년 10월, 남편이 행방불명 되자 당시 수용소였던 옛 화북국민학교로 끌려갔습니다.
생애 첫 전기에 대한 경험을 집도 마을도 아닌 고문장에서 겪었습니다.
[양중윤 4·3 유족(100세)]
"전기 고문하려고 손목을 내밀라고 하니 손목을 잡고 전깃줄을 감아. 어떻게 했는지 몸에 차르르 전기가 올라오면 애기 안고 그냥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 말한다고 와서 두들겨 패고."
품에 안은 두 살 아들을 살리고자 온 몸으로 고문을 막아내고 버텨냈던 그날의 기억은 70여 년이 지나 처절한 몸부림으로 되살아납니다.
[김은실/이화여대 명예교수]
"피해자의 가장 중요한 범주가 죽음을 당한 자. 혹은 죽은 자들이잖아요.근데 이제 죽은 자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의 과정을 다 목격한 목격자로서의 여성. 저는 그들 또한 어마어마한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제주 여성은 4.3 성착취 피해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인권 유린 실태는 4.3 역사에서 축소 은폐되거나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조차 한줄 기록으로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성폭력 피해나 고문 학대의 고통을 드러내는 건 가족은 물론 마을, 심지어 공동체의 수치로 여겨지던 시국에서 여성들은 더욱 움츠리고 입을 굳게 닫아야 했습니다.
[김성례/서강대 명예교수]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이런 말까지 심하게 했어요. 왜냐하면 국가의 폭력적인 성 정치에 의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게 만든 거죠. 그게 소위 국가 권력의 가부장적 폭력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지금까지도 아주 오랫동안 쉬쉬대고 연구가 정말 없습니다."
국가 공권력과 가부장제 폭력 피해를 겪은 1세대 여성들의 아픔과 트라우마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고 4.3 이후의 생애사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름 없는 희생자의 비석처럼 누군가의 아내, 딸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KCTV뉴스 김용원입니다.
KCTV제주방송은 송년특집으로 4.3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제주 여성들을 조명하는 기획 뉴스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살아남은 제주 여성들은 4.3 시국을 온 몸으로 겪었고 생존에 내몰린 채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희생자 지정 등 각종 제도권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4.3 여성들이 피해 회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용원 기자입니다.
4.3 당시 705명이 희생된 서귀포시 안덕면의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인 동광리 무등이왓.
화전을 일구고 목축을 해온 마을은 4.3에 의해 300년 설촌 역사가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1948년 10월, 중산간 소개령과 11월 17일 제주에 주둔했던 제9연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하는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불과 나흘 뒤인 1948년 11월 21일 무등이왓에도 계엄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주민 100여 명이 억울하게 희생됐고 130여 세대가 살던 집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습니다.
"대나무들은 죽지 않고 다 살아있고 사람들은 다 돌아가버리고. 아이고 이렇게도 될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무등이왓 초토화작전 생존자인 강춘화 어르신도 당시 온 가족이 폭도로 의심 받자 해안가 대신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4개월 넘는 피신 생활은 추적하던 군경에 발각됐고 가족 9명을 잃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할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인과 경찰의 모습은 7살 손녀에게 두려움과 공포로 각인됐습니다.
[강춘화 4·3 유족(83세)]
"순경 한 명 앞에 서고 우리가 굴에 있던 사람들이 열 지어서 내려가는데 돌아보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총으로 팡팡 쏴 죽여서 두 사람이 들어서 굴 속으로 픽 던졌어."
성인 남성은 죽거나 행방불명됐고 여성과 아이들은 당시 민간 최대 수용시설이던 제주읍 주정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공작에 속아 중산간 주민 6천 14명이 산에서 내려왔고 이 가운데 절반인 3천 여 명이 주정공장에 갇혔습니다.
수용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3배 이상 많았습니다.
없던 죄도 만들어내던 수용소에서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대신해 여성들은 매일 고문과 취조, 폭행을 당했습니다.
[강춘화 할머니]
"말만해도 섬뜩해. 난 그걸 보고 고모, 이모들이 하도 매맞고 하니 아이고 섬뜩해. 그 때 처녀들은 더 얼먹었어.
주정공장에서 풀려났지만 살아도 산게 아니었습니다. 해안 마을에서 이들은 폭도라는 낙인이 찍혔고 다시 산으로 돌아왔지만, 삶의 터전은 무너지고 공동체는 해체됐습니다.
7살 소녀는 호적에 이름 석자 갖지 못했고 학교를 다니거나 배움의 기회조차 배제됐습니다.
남자가 절멸한 공포를 경험한 생존 여성 가족들은 자녀의 이름을 짓거나 교육을 받게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기무꾸(일본 이름) 밖에 몰랐고, 아이고 공부도 못하고 이름도 없이 살다가 동광리 올라오니 친척 할아버지가 호적에 올리면서 이름을 '춘화'라고 지어주니까 지금 사람들은 춘화라고 부르지. 옛날 죽어버린 어른들은 모두 기무꾸로 밖에 몰라."
4.3이라는 시국은 강 어르신을 비롯한 제주 여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습니다.
[허영선 / 전 4·3연구소장]
그분들이 그 당시에 어린 소녀였습니다. 이 어린 소녀들이 곧바로 그 또래의 즐거움 그리고 그 또래가 갖춰야 할 어떤 행복감 누려봤을까요?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전 생애 자체가 완전히 뒤틀려버리게 만든 게 이 4·3이란 말이에요."
70여년 지나 4.3 희생자 신청을 했지만 주정공장 수용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정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4.3 희생자 1만 4천여 명 가운데 20%에 불과한 4.3 여성의 피해와 희생을 숫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유철인/제주대 명예교수]
"실제로 여성들은 자신의 자식이나 남편이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고통이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희생자 숫자만 가지고 여성들의 피해를 생각할 수 없고 훨씬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4.3 생존자이자 목격자이지만 아픔도 드러내지 못한 채 생존에 내몰렸고 제도권에서조차 보호받거나 치유받지 못하는 제주 어멍들의 4.3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KCTV뉴스 김용원입니다.
오늘 (9) 오후 5시쯤
제주시 봉개동에서 주행중인
8.5톤 화물차의 타이어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빠진 타이어는
사고 현장에서 100m 가량 굴러갔고
길을 걷던 70대 보행자가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경찰과 소방은
바퀴가 빠지게 된 이유 등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제주소방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