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기획 4] 4.3 무너진 터전 "재건과 어멍"
김용원 기자  |  yy1014@kctvjeju.com
|  2026.04.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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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TV 4.3 기획 마지막 순서입니다.

4.3으로 초토화된 중산간 마을을 재건한 건
국가가 아닌,
4.3 광풍에서 살아낸 이들과 어멍들이었습니다.

주요 재건 사례을 소개하고
원동력은 무엇인지 김용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1948년 5월,
제주 비행장에 집결한 미군정과 군 수뇌부의 최고회의는
평화협상 대신
4.3 강경 토벌이라는 비극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주정공장 수용소에는 끌려온 이들의 비명이 가득했고
3천 명 이상이
생사를 모른채 행방불명됐습니다.

선무 공작에 속아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까지
고구마 창고에 갇혀
고문과 학살의 공포를 견뎌야 했습니다.

<송승문 / 전 4·3유족회장>
“군경에 의해서 구타당하고 폭행당하고, 포승줄에 묶여서 서쪽 이 바다에 내던져지면 그분들이 육지까지. 대마도까지…. 생사의 갈림길이 여기다.”

1948년 11월, 계엄 광풍 속에
애월 봉성리 '자리왓'을 비롯한
중산간 마을 130여 곳이 화마 속에 사라졌습니다.

1954년 금족령이 풀린 뒤 돌아온 고향은
온기가 사라진 검게 탄 흙과 잡초 뿐이었습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초토화됐지만
무너진 마을을 다시 세우는 건 살아남은 주민들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봉성 자리왓 주민들이 이주한 4.3 재건 마을인
애월읍 신명동도
수눌음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75년 전, 1951년 신명동 회의록에는
나무 심기 기금을 모으고
야간 경비조를 편성하며
마을과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기록이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장윤식 / 제주4·3연구소 이사
“그 분들이 초토화되니까 산으로 피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봉성 1구로 내려와서 피난 생활을 했고. 봉성 2리 6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에 비어 있는 땅을 매입해서 새로운 마을을 한번 만들어보자 해서 회의 결과가 통과됐고, 그 힘으로 신명리라는 새로운 마을 이름을 지어서 여기에 재건하게 된 거죠.”

생계를 책임졌던 홀어멍들은 마을 재건에도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재건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지원은 전무했고
홀어멍들은 '수눌음’으로
서로의 비바람을 막아주며
무너진 공동체의 그릇을 새롭게 빚어냈습니다.

직접 돌을 나르고 담을 쌓으며
희생된 남성 노동력의 빈자리를 채웠고
보금자리를 손수 일궜습니다.

<신엄리 어르신 3분 >
""

어멍들의 헌신은 새롭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4.3 재건마을 한림읍 금악리는
규약인 '향약'에
여성의 참여와 권리를 명문화하면서
마을 대소사에
여성들의 자격과 권한을 보장하는 등 자치권 확대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안관홍 / 한림읍 금악리장>
“어머님들 때문에 마을이 재건되고 지금까지 유지가 잘 되고. 지금은 마을 전체가 공동체로 잘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향약 개정 위원회를 별도로 꾸려서 같이할 수 있는 부분을 같이 해보자고 해서 시작을 했습니

4.3으로 해체된 폐허 속에서
제주 신당과 심방 문화, 해녀 신앙은
모진 세월을 버티게 한 정신적 뿌리였고
치유의 힘은
제주 재건 역사의 주춧돌이 됐습니다.

<장윤식 / 제주4·3연구소 이사>
“그때는 젊은 남자들이 많이 희생됐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살아남은 남자들 대부분 군으로 입대하게 되니까. 그러한 여성들의 역할이 상당히 힘든 과정이고, 그런 것들이 오늘날 제주도를 이끌어낸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이 같은 연대의 서사는
세대를 넘어 기억되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로 전승되며
오늘도
제주섬 곳곳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KCTV뉴스 김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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